1950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여 남한과 유엔군에 대항하기 위해 파병하였으며, 이는 1949년 이후 중국이 참전한 주요 대외 전쟁 중 하나가 되었다.
2026년 8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중국공산당(CCP)이 약 2억 2천만 건의 미국 유권자 기록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관련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중국 정보기관은 전담 부서를 설치하여 이 자료를 분석 및 활용해 왔으며, 방대한 유권자 정보를 집약한 선거 데이터베이스를 주요 정보 수집 목표로 삼았다. 해당 자료는 중국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외국 시민 정보 수집 활동의 일환으로 관찰되고 있으며, 이번 사건은 선거 보안뿐만 아니라 개인 정보가 정보 분석 및 기타 전략적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2026년 5월
2026년 5월에 열린 트럼프-시진핑 회담은 위마오춘(余茂春)에 의해 미국 외교 정책에서 전략적 판단이 환상으로 대체되는 위험한 경향을 노출했다고 해석되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이번 정상회담을 이용해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같은 신화를 부풀려 자국의 권위주의적 본질, 국내적 곤경, 그리고 자유 세계에 대한 적대감을 은폐하려 했다고 보았다. 정상회담은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오판과 유화 정책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2026년 5월
베이징은 최근 대만, 베네수엘라, 이란 및 전 세계적 역할 등 이슈에 대해 미국을 향해 빈번하게 엄중한 경고를 발령하며 미국의 행동을 위험하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대만을 핵심 이익이라 칭하며 군사 훈련을 확대해 봉쇄를 시뮬레이션했으나, 분석가들은 이를 실질적 선택지가 결여된 허약한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026년 1월
1월 초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던 미국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군사 작전 이후, 최고위급 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인민해방군 고위 장성들이 실종되었다. 3월 초 양회 기간 동안 26명의 상장(대장급) 중 6명만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중앙군사위원회 군 측 위원 6명 중 4명이 최근 몇 달 사이 숙청된 것으로 나타나 군 내부의 심각한 정치적 동요를 보여주고 있다.
2024년 11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2024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시진핑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대만, 민주주의와 인권, 정치제도, 발전권을 아우르는 이른바 4대 레드라인을 제시하며 미국 새 정부에 간섭 불가 영역을 설정하려 했다.
2022년 11월
장기간 이어진 엄격한 제로 코로나 방역 봉쇄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중국 여러 지역에서 이례적인 전국적 항의 활동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언론 검열을 상징하는 백지를 들고 시위에 나섰으며, 결국 당국은 방역 정책을 갑작스럽고 혼란스럽게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2001년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미 2001년에 쿠바 내 중국의 도청 및 군사 활동을 감지했다. 소련 해체 후 카스트로 정권이 뒷배를 잃자 베이징은 이를 틈타 쿠바를 반미 최전선 기지로 전환하고 비밀 협정을 통해 장비를 현대화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은 1989년 10월 7일에도 성대한 열병식을 거행했으나, 막대한 부채와 지도부의 1989년 6·4 톈안먼 사건 지지가 민심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크렌츠가 총서기로 취임한 후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 고위층과 맹목적으로 악수한 것이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결국 1년도 안 된 1990년 10월 3일 서독에 흡수되었다.
장소: 베를린, 독일 ·
중요도 IV ·
검증 상태: 확인됨 ·
인과관계 보기 →
1972년
1972년,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던 닉슨은 성과를 얻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으며, 중국공산당과 접촉한 본래의 의도는 중국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과의 교류 과정에서 닉슨 행정부는 중국을 변화시키겠다는 목표에서 점차 벗어나 '구동존이(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은 남겨둔다)'를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베트남 문제에서 중국공산당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미군 철수와 수교 등 대만 문제에서의 양보를 약속했다. 이러한 전략의 변화는 미국이 중국공산당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미국을 농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는 냉전의 배경 속에서 제2758호 결의안을 채택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 내 중국 대표권 자리를 중화민국으로부터 승계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의안은 절차와 실체 면에서 심각한 법리적 결함이 존재하며, 대만의 주권적 지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이 결의안은 중국공산당이 대만의 국제 참여를 억압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1955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카이로 선언'은 단지 의향서일 뿐이며, 대만의 주권 귀속은 이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만 문제가 중국의 내정이 아니라 여러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국제적 의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1950년 6월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 미국, 대만, 중국공산당 사이에는 장기적인 정책적 현실이 형성되었다. 즉, 중국 대륙과 대만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치적 실체로 간주된 것이다. 그 이후 미국은 대만 해협 문제를 다룰 때 대만의 지위가 어떤 국제 문서에 의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고 보지 않았으며, 대신 양안 관계, 무력 사용, 대만의 정치적 미래를 둘러싼 정책적 조치를 지속해 왔다.
1950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 제7함대는 대만해협 순찰대를 창설하여 구축함과 주력 함정들이 대만해협에서 지속적으로 정기 순찰을 수행함으로써 충돌을 억제하고 대만해협의 국제 항행 개방을 보장하여, 약 20년간 이어지는 대만해협 평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1년
위마오춘(余茂春)은 중국공산당이 1921년 창당 이래 일련의 정책과 운동을 통해 중국 인민을 상대로 100년간 내전과 압제를 가해왔다고 지적하며, 이를 중국 인민에게 진정한 '100년의 굴욕'으로 규정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CCP)은 1921년에 창당되었다. 프로그램은 당사를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역사적 사명으로 해석하며, 중국공산당이 이후 스스로를 가장 진보적인 프롤레타리아 선봉대로 묘사하고 당은 결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고 여겼음을 지적한다. 진이난(金一南)이 저술한 『고난휘황(苦難輝煌)』 또한 중국공산당의 창당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사명감과 불패의 서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1898년
미서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계획 수립을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오렌지 계획(War Plan Orange)이 포함되었다. 이 계획은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발생 시 대응 방식을 미리 상정해 둔 것이었다. 이후 수십 년의 준비를 거쳐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관련 계획을 전시 배치에 적용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앤슨 벌링게임을 주중 미국 공사로 임명했으며, 그는 중국이 제국주의 착취의 대상이 아닌 주권을 가진 평등한 국가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